니까야로 읽는 <금강경(金剛經)>/이중표 교수 (2024)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金剛經)>

<강의 소개>

1. 이 강의를 하게 된 이유

불교의 진리는 사성제(四聖諦)이다.

고성제(苦聖諦)는 괴로운 현실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하고,

고집성제(苦集聖諦)는 괴로운 현실의 원인을 의미하며,

고멸성제(苦滅聖諦)는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하면 괴로움도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멸도성제(苦滅道聖諦)는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여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괴로움이 없는 곳에는 불교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괴로움이 있는 곳에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불교다.

현대사회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괴로움이 많은 시대다. 특히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괴로운 곳이다. 자살률이 세계 1위인 나라, 청소년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조선시대에 조선에 왔던 외국인들은 우리나라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인근의 여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렀다. ()를 숭상하고, 자신을 잘 제어하여 남들과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나라, 이것이 본래 우리나라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나라가 되었고, 가장 염치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되었고, 가장 고통스러운 땅이 되었다.

왜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우리의 근대사는 수난의 역사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군부 쿠데타와 군부독제를 거치면서 우리의 삶과 전통은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여기에 서구의 개인주의 사상과 자본주의 경제가 무분별적으로 흘러들어와 경제발전과 부의 성취가 이 나라의 가장 큰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기에 서구 문물을 등에 업고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이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어야 부자가 된다,’는 가르침으로 변질되었고, 정화(淨化)라는 명분의 분쟁에 휩쓸려 갈피를 잡지 못하던 불교는 중생의 교화보다는 개인의 성불, 승려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현실이 되었다. 개인의 욕망의 성취와 재물의 소유가 승속을 막론하고 가장 큰 가치가 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으며, 재물만 소유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나라로 만든 원인은 가난이 아니라 개인적인 욕망의 추구와 끝없이 재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이다.

따라서 이 나라에,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발전이 아니라 불교다.

그런데 불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종지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이고,

소의경전은 금강경(金剛經)과 전등법어(傳燈法語)’이다.

조계종은 금강경(金剛經)과 전등법어(傳燈法語)에 의지하여 직지인심(直指人心)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전법도생(傳法度生)하는 것을 추구하는 종단인 것이다. 이 종지에 따라 수많은 사찰에서 수많은 불자들이 금강경(金剛經)을 독송한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전등법어(傳燈法語)에 의지하여 간화선(看話禪)에 몰입한다. 그런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안 된다. 그러니 전법도생(傳法度生)에 나설 수가 없다.

90년대를 전후하여 답답함을 느낀 수행자들이 다른 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그동안 소승불교라고 얕잡아보던 남방불교에 눈을 돌린 것이다.

그들은 미얀마, 태국 등지에서 남방 상좌부 전통의 위빠사나 수행을 익히고 돌아온다. 이들을 통해 소승경전으로 홀대받던 <아함경>이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된다. 그리고 남방불교 소전의 <니까야(Nikāya)>와 아비달마 논서(論書)들이 번역 소개된다. 이들은 대승불교를 비판한다.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이렇게 새로운 논쟁에 빠져있다. 과연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닐까? 대승 경전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현재 남방불교에서 의지하고 있는 아비달마 논서들도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다. 그리고 현재 남방불교의 수행법은 <니까야>에 의거한 수행법이 아니라 붓다고사의 <청정도론(淸淨道論)>에 의거한 수행법이다. 따라서 같은 논리에 따르면 남방불교도 불교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이 불교인가 아닌가는 그 내용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문제이지 부처님의 직설 여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대승불교의 부정은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대승불교 전통에 대한 부정이다. 우리는 1700여년의 불교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불교가 아니란 말인가? 만약에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아니라면, 아무리 오랜 역사 속에서 신봉되었다 할지라도 동북아시아 불교는 부정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불교가 아니라는 비판은 섣부른 단견이다, 그 내용을 깊이 살펴보면 아비달마불교가 오히려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진 것이고, 대승불교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초기 대승경전인 <금강경(金剛經)>

<니까야>를 통해 해석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소의경전이다. 따라서 금강경의 정통성이 확인된다면 조계종의 정통성도 확보될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의 바른 이해를 통해서 조계종의 종지를 바르게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내가 이 강의를 하게 된 이유는 이상과 같다. 다시 말하면,

첫째, 우리가 사는 현대가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불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둘째, 고통스러운 사회를 구제해야 할 불교가 내분 속에서 정통성 논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여 이러한 논쟁을 종식하고 한국불교가 고통스러운 한국사회를 구원하는 불교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2. <금강경(金剛經)>은 어떤 경인가?

1) 경의 이름

이 경의 범어(梵語) 이름은 Vajra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이다. Vajra’는 번개와 벼락, 또는 번개와 벼락의 신인 제석천(帝釋天)이 들고 다니는 무기인 금강저(金剛杵)를 의미한다. ‘chedikā’끊는, 절단하는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prajñā’는 반야(般若), 즉 통찰지(通察智)를 의미하고, ‘pāramitā’피안(彼岸)으로 간다.’는 의미이고, ‘sūtra’는 경()을 의미한다. Vajra’<맛지마 니까야> 35. Cūḷasaccaka-sutta(쌋짜까에게 설하신 작은 경)에 등장한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치며, 고따마 존자의 제자들에게 주로 어떤 내용을 가르칩니까?”

악기웨싸나, 나는 다음과 같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제자들에게 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치오.”

비구들이여,

형색()은 무상(無常)하다.

느끼는 마음()은 무상하다.

생각하는 마음()은 무상하다.

조작하는 행위()들은 무상하다.

분별하는 마음()은 무상하다.

비구들이여,

형색()은 자아(自我)가 아니다.

느끼는 마음()은 자아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은 자아가 아니다.

조작하는 행위()들은 자아가 아니다.

분별하는 마음()은 자아가 아니다.

일체의 조작하는 행위()들은 무상(無常)하다.<諸行無常>

일체의 법()은 자아가 아니다.<諸法無我>’

악기웨싸나, 나는 이와 같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주로 이와 같은 내용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오.”

<중략>

고따마 존자여, 저는 형색()은 나의 자아다. 느끼는 마음()은 나의 자아다. 생각하는 마음()은 나의 자아다. 조작하는 행위()들은 나의 자아다. 분별하는 마음()은 나의 자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중략>

악기웨싸나,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대는 형색()은 나의 자아다.’라고 말했는데, 그 형색()에 대하여 내 형색()은 이렇게 되어라! 내 형색()은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할 수 있는 힘이 그대에게 있나요?”

이렇게 말씀하시자, 쌋짜까 니간타뿟따는 침묵했습니다.

다시 물었지만, 쌋짜까 니간타뿟따는 침묵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쌋짜까 니간타뿟따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악기웨싸나, 어서 대답하시오! 지금 그대에게는 침묵하고 있을 시간이 없소. 악기웨싸나, 누구든 여래가 같은 물음을 세 번을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는 사람은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쪼개질 것이오.”

그때 금강저(金剛杵)를 손에 든 야차(夜叉)가 붉은 화염에 휩싸인 작열하는 무쇠 금강저를 들고 쌋짜까 니간타뿟따 머리 위의 공중에 서서, ‘만약에 쌋짜까 니간타뿟따가 세존께서 세 번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머리를 일곱 조각으로 쪼개버리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금강저를 손에 든 야차를 세존도 보고 쌋짜까 니간타뿟따도 보았습니다. 쌋짜까 니간타뿟따는 무서워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을 느끼고, 세존께 피난처를 구하고, 세존께 도피처를 구하고, 세존께 의지처를 구하여, 세존께 말했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에게 물으십시오.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악기웨싸나,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대는 형색()은 나의 자아다.’라고 말했는데, 그 형색()에 대하여 나의 형색()은 이렇게 되어라! 나의 형색()은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할 수 있는 힘이 그대에게 있나요?”

고따마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악기웨싸나, 잘 생각하시오. 악기웨싸나, 잘 생각하고 대답하시오. 그대의 말은 앞뒤가 맞지를 않소. 악기웨싸나,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대는 느끼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 조작하는 행위(), 분별하는 마음()은 나의 자아다.’라고 말했는데, 그 느끼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 조작하는 행위(), 분별하는 마음()에 대하여 나의 느끼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 조작하는 행위(), 분별하는 마음()은 이렇게 되어라! 나의 느끼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 조작하는 행위(), 분별하는 마음()은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할 수 있는 힘이 그대에게 있나요?”

고따마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 경에서 야차(夜叉)가 손에 든 붉은 화염에 휩싸인 작열하는 무쇠 금강저는 사견(邪見)을 끊어버린다.

그렇다면 사견(邪見)은 어떤 것인가?

형색()을 지닌 몸이 나의 자아다.

느끼는 마음()이 나의 자아다.

생각하는 마음()이 나의 자아다.

조작하는 행위()들이 나의 자아다.

분별하는 마음()이 나의 자아다.’라고 생각하는,

즉 오온(五蘊)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견(邪見)이다.

이와 같이 Vajrachedikā’는 오온(五蘊)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사견(邪見)을 끊어버리는 금강저(金剛杵)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금강저(金剛杵)prajñā’, 즉 반야(般若)의 비유이다.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금강저와 같이 반야(般若)가 오온(五蘊)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사견(邪見)을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야(般若)는 무엇이기에 오온(五蘊)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사견(邪見)을 끊을 수 있을까?

지혜라 번역되는 반야(般若)는 통찰하는 지혜, 즉 통찰지(通察智)를 의미한다.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오온(五蘊)을 통찰하여 그것이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통찰지(通察智)가 반야(般若). 이렇게 통찰지(通察智)로 오온(五蘊)이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통찰함으로써 사견(邪見)을 끊어버리고 자아(自我)라는 망상(妄想)에서 해탈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열반(涅槃)이다. 열반은 바른 통찰지로 오온을 통찰하여 무아임을 자각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다. ‘pāramitā피안, 즉 열반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prajñāpāramitā’통찰지를 통해서 피안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이 Vajrachedikā-prajñāpāramitā’의 의미이다.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금강저(金剛杵)와 같은 통찰지(通察智)

오온(五蘊)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사견(邪見)을 끊어서 열반(涅槃)

도달한다는 가르침이 금강경(金剛經)이다.

2) <금강경(金剛經)>은 어떤 경인가?

대승경전 가운데서 반야부(般若部)는 가장 일찍 성립된 경전인데, <금강경(金剛經)>은 반야부(般若部)에 속하는 초기대승경전이다.

<금강경(金剛經)>에는 대승(大乘;Mahāyāna)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다.

이것은 이 경이 대승불교가 아비달마불교를 소승(小乘;Hīnayāna)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을 대승이라고 부르기 이전에 성립된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금강경(金剛經)>은 반야부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시기에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대승불교운동의 초기에 형성된 반야부(般若部) 경전과 <금강경(金剛經)>을 통해서 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으며, 대승불교는 무엇을 추구했는가를 알 수 있다. 반야부(般若部) 경전이란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을 설하는 경전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지혜의 완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보다는 통찰하는 지혜(般若)로 저 언덕(涅槃)에 간다.’로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반야부 경전은 지혜의 완성을 목표로 설해진 것이 아니라, ‘열반은 반야(般若), 즉 통찰하는 지혜를 통해 성취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경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반야용선(般若龍船)이다. 반야(般若)는 괴로운 이 언덕(生死)에서 행복한 저 언덕(涅槃)으로 건네주는 배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초기의 대승불교운동가들은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을 주장했을까? <맛지마 니까야> 22. Alagaddūpama-sutta(독사의 비유 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비구들이여, 비유하면, 길을 가던 어떤 나그네가 이쪽 언덕은 무섭고 위험하고, 저쪽 언덕은 안전하고 위험이 없는 범람하는 큰 강을 만났는데, 이 언덕(此岸)에서 저 언덕(彼岸)으로 갈 수 있도록 강을 건네줄 배가 없었다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오.

이 큰 강은 이쪽 언덕은 무섭고, 위험하고, 저쪽 언덕은 안전하고, 위험이 없다. 그런데 이 언덕(此岸)에서 저 언덕(彼岸)으로 갈 수 있도록 강을 건네줄 배가 없구나. 나는 풀, 나무토막, 나뭇가지, 나뭇잎을 모아 뗏목을 엮은 다음, 그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을 힘껏 저어서 안전하게 저 언덕(彼岸)으로 올라가야겠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그 사람은 풀, 나무토막, 나뭇가지, 나뭇잎을 모아 뗏목을 엮은 다음, 그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을 힘껏 저어서, 안전하게 저 언덕(彼岸)으로 올라갔다오. 그런데 강을 건너 저 언덕에 올라간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시다.

이 뗏목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하여 안전한 언덕으로 올라왔다. 그러니 나는 이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지고 갈 길을 가야겠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이 그 뗏목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어!”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그 사람이 그 뗏목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비구들이여, 이제 강을 건너 저 언덕에 올라간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시다.

이 뗏목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하여 안전한 언덕으로 올라왔다. 나는 이 뗏목을 땅위에 올려놓거나, 물에 띄워놓고 갈 길을 가야겠다.’

비구들이여, 그 사람이 뗏목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나는 이와 같이 뗏목의 비유, 즉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한 것이지,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설법을 했다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뗏목의 비유를 이해하여, 마땅히 가르침()들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非法)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벌유경(筏喩經;뗏목의 비유 경)>으로도 불리는 이 경에서 부처님은 열반을 저 언덕으로 비유하시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열반으로 우리를 건네주는 뗏목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열반으로 가는 길을 팔정도(八正道)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팔정도(八正道)는 계(), (), () 삼학(三學)에 포함된다.

<맛지마 니까야> 44. Cūḷavedalla-sutta(교리문답 작은 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위싸카 존자여,

세 가지 온()에 성자(聖者)8정도가 포함됩니다.

위싸카 존자여,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계온(戒蘊)에 포함되고, 정정진(正精進)과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정온(定蘊)에 포함되고,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혜온(慧蘊)에 포함됩니다.

이와 같이 팔정도(八正道)가 계(), (), () 삼학(三學)에 포함된다면, 이 가운데 무엇이 열반으로 가는 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까?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열반은 깊은 삼매를 통해서 성취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시 말해서 열반을 깊은 삼매의 경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 의하면 열반은 삼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열반을 성취하는 과정을 <맛지마 니까야> 111. Anupada-sutta(次第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싸리뿟따는 보름동안 연속하여 관찰되는 법()을 관찰했다오. 비구들이여, 싸리뿟따가 관찰한 연속하여 관찰되는 법()은 다음과 같다오.

비구들이여,

싸리뿟따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멀리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멀리하고, 사유하고 숙고하여, 멀어짐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 번째 선정(初禪)에 도달하여 머물렀다오.

이 첫 번째 선정에서 여러 법()들이, 즉 사유, 숙고, 기쁨, 즐거움, 마음집중, (), 느낌(), 생각(), 의도(), 욕망, 확신, 정진(精進), 주의집중(), 평정(), 작의(作意), 이러한 법()들이 그에게 연속하여 나타났다오. 그에게 이러한 법()들이 분명하게 나타나, 분명하게 머물다가, 분명하게 소멸되어 갔다오.

그는 이와 같이 통찰하여 알았다오.

이와 같이 지금 나에게 여러 법()들이 없다가 나타났고, 있다가 없어졌다.”

그는 그 법()들에 집착하지 않고, 빠져들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한 마음에 머물렀다오.

그는 이보다 위의 출리(出離)가 있다라고 통찰하여 알았다오. 그는 더 닦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오.

비구들이여, 싸리뿟따는 그 후에 다시 사유와 숙고가 적멸함으로써 내적으로 평온한, 마음이 집중된, 사유가 없고 숙고가 없는, 삼매(三昧)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두 번째 선정(第二禪)에 도달하여 머물렀다오.

<중략>

비구들이여, 그 후 다시 싸리뿟따는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에 대한 관념을 초월함으로써 상수멸(想受滅)에 도달하여 머물렀다오. 그리고 통찰지(般若)로 통찰하자, 번뇌()들이 멸진(滅盡)했다오.

그는 주의집중이 있는 상태에서 그 선정으로부터 나왔다오. 그가 주의집중이 있는 상태에서 그 선정으로부터 나와서, 이전의 사라지고 변해버린 그 법()들을 생각했다오.

이와 같이 지금 나에게 여러 법()들이 없다가 나타났고. 있다가 없어졌다.”

그는 그 법()들에 집착하지 않고, 빠져들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한 마음에 머물렀다오.

그는 이보다 위의 출리(出離)는 없다라고 통찰하여 알았다오. 그는 더 닦아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오.

비구들이여, 만약 어떤 사람을 거룩한 계()에서 자재(自在)와 피안(彼岸)을 얻고, 거룩한 정()에서 자재와 피안을 얻고, 거룩한 통찰지(般若)에서 자재와 피안을 얻고, 거룩한 해탈(解脫)에서 자재와 해탈을 얻은 사람이다.”라고 진정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싸리뿟따가 진실로 그런 사람이라오.

비구들이여, 만약 어떤 사람을 세존의 입에서 태어난, 가르침()에서 태어난, 가르침()으로 만들어진, 재산의 상속자가 아니라 가르침()의 상속자인 세존의 아들이다.”라고 진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싸리뿟따가 진실로 그런 사람이라오.

비구들이여, 싸리뿟따는 여래가 굴리는 위없는 법륜(法輪)을 바르게 잘 굴린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오.

이 경은 싸리뿟따가 위빠싸나를 통해 계(), (), () 삼학(三學)을 닦아 열반에 도달하는 과정을 구차제정(九次第定)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멀리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멀리하는 것이 계()의 실천이다. 초선(初禪)은 계()를 실천하여 도달하는 선정(禪定)이다. 이후 제이선(第二禪)에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까지는 정()의 수행이다. 그런데 계()와 정()의 수행에 항상 반야(般若), 즉 통찰지(通察智)가 작용한다. 불교의 계()와 정()에는 항상 혜()가 수반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에서 나와 혜(), 즉 반야(般若)로 통찰함으로써 모든 번뇌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니까야에서는 열반이 선정(禪定)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정(禪定)에서 나와 반야(般若)로 통찰함으로써 성취된다고 이야기한다. 반야부(般若部) 경전들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열반은 반야(般若)로 통찰하여 성취되는 것이지, 깊은 선정(禪定)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초기 대승불교운동가들은 이러한 반야바라밀을 주장했을까? 그것은 당시의 아비달마불교가 선정(禪定) 속에서 열반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불교인들은 열반을 현실과 유리된 초월적인 경지로 이해했다. 생사(生死)의 현실은 유위(有爲)의 세계이고, 생사를 초월한 열반은 무위(無爲)의 세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위(無爲)는 현실을 벗어난 깊은 선정(禪定)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승불교 사상가들은 이러한 아비달마불교를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열반은 생사의 현실을 벗어난 선정 속에 있 것이 아니라, 생사의 현실을 지혜로 통찰하여 본래 생사가 없음을 깨들음으로써 성취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니까야와 아함경에 설해진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초기대승불교인들은 현실을 피하여 선정(禪定) 속에 빠져있는 아비달마불교를 향해서, 현실을 직시하고 지혜로 통찰하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진정한 불교이고 열반이라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금강경(金剛經)>을 포함하는 반야부 경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이라는 경의 이름을 통해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3. <금강경(金剛經)>의 취지(趣旨)와 보살의 길

금강경의 서두에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希有世尊如來善護念諸菩薩善付囑諸菩薩世尊善男子善女人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應云何住云何降伏其心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보살들을 마음에 두시고, 보살들에게 부처님의 뜻을 맡기셨군요!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위없는 평등한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마음을 일으키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수보리는 여래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보살(菩薩)이라고 천명한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취지가 아비달마불교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大乘), 즉 보살승(菩薩乘)은 아비달마불교와 어떤 점이 다른가? 그것은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에 대한 이해이다. 그래서 수보리는 보살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다. 수보리의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답하신다.

첫째, ‘보살은 일체중생을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모두 제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가르침을 아비달마불교 식으로 이해하여 개인이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는 것을 불교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부처님의 본뜻이 아니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부처님의 본뜻은 불법을 깨우쳐서 일체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데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러나 실은 멸도를 얻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은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아라는 망상에서 벗어나는데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보살임을 천명한 것이다.

여기에서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 없는 것, 즉 무아상(無我相)이 직지인심(直指人心)이며 견성(見成)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여 일체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는 것이 성불(成佛)이며, 이러한 성불의 과정에 실로 한 중생도 멸도에 든 중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전법도생(傳法度生)이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에 선후의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직지인심(直指人心)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한 후에 전법도생(傳法度生)하는 것이 아니라, 직지인심(直指人心)하면 전법도생(傳法度生)하지 않을 수 없고, 전법도생(傳法度生)하는 삶이 곧 성불(成佛)한 사람의 삶이다.

이것이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돈법(頓法)이다. 조계종은 이러한 금강경(金剛經)을 소의경전으로 직지인심(直指人心)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 전법도생(傳法度生)하는 것을 종지로 하는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돈법(頓法)을 계승한 종단이다.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강의는 이러한 조계종의 종지가 초기 근본경전인 니까야에 근거를 둔 불교의 정통임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불교가 무의미한 논쟁에서 벗어나 고통에 빠진 사회를 구원하는 불교본연의 불사에 매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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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표 교수님 [금강경 강의 1]

- 목적지가 있을 때 길이라고 한다. 목적지가 없으면 길이 아니다. 길은 목적을 향해서 갈 때 길이라고 부른다. 정확하게 목적을 알고 갈 때 불교 공부가 된다.

-허망한 것 찾지 마라. 와서 보라.

-내가 깨달은 진리는 사성제(고집멸도)이다. 고집성제, 고멸성제, 고도성제

-괴로움이 없는 곳에는 부처님 진리가 아무 의미 없다. 괴로움이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불교 공부를 통해 남을 제도하는 게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자각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통증 없는 질병이 가장 무섭다.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고통이 소중하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각을 일깨워 준다. 괴로움을 못 느끼고, 고민을 하지 않는 젊은이들의 무감각이 심각하다. 감동, 질문이 없다. 고통 속에서도 각성하고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이것은 현대인의 문제이다.

-현대는 고통스러운 사회이다. 경제적인 것 외에도 고통스러운 것이 많다. 그런데도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심각하다.

-고성제, 인간의 내면적 고통의 뿌리이다. 이것을 보는 것이 시작이다. 석가모니는 사회적 지위, 명예, 부를 갖고 태어난 기득권인데, 모든 것을 버리고 맨발로 걸식하며 평생 돌아다니며 살았다. 이것이 금강경의 테마이다. 석가모니의 고통은 죽음. 누구나 죽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이것을 알지만 피상적으로만 알고, 정말 죽음을 느끼면서 살지는 않는다. 정말 죽을 것을 직시하며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생과 죽음은 호흡지간이다.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는 것이 삶과 죽음이다. 경계가 멀지 않다. 난 언제나 죽을 수 있다. 급하다. 원을 세워라.

-부처님 말씀이 세상에 드러나야 한다. 사람이 볼 수 있는 경이 많지 않다. 부처님 본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경전 없다. 부처님 앞에 원을 세워 실천하라. 일삼아 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새벽 3-4시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까지 불경을 번역하였다.

-[맛디나 니까야] 2월 출간 예정. 바로 보는 공부를 강의하다.

-우리들 삶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인생은 허망하다. 누구나 죽음 앞에 서 있음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무명 앞에 생로노사가 있다.

-괴로움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수행이다. 본질은 '오취온'이다. 색, 수, 상, 행, 식이다. [반야심경]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교 공부란 오온을 정확히 성찰하고, 오온 속에 ‘나’라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면 허상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

-목적지를 알고 가야 길을 제대로 간다. 불교 공부 또한 마찬가지이다. 불교의 목적은 해결해야 할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다.

-아라한은 무학, 공부를 할 필요 없다. 저절로 삶에서 공부가 된다.

-내 인생에서 중심이 안 되어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누구인가?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라는 말에 상응하는 것을 취한다. 부처님 사용하는 말도 정확하게 알고 써야 하는데, 개념적으로 쓴다. 부처님 말씀은 삶 속에서 깨달은 내용이다.

-아어취(?)로 취한 것이 '오취온'이다. 말에 상응하는 것이 있으니까 그 말을 쓴다. '나'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지시어가 있다. 부처님이 6년간 철저히 연구한 나의 정체. (나: 형태가 있는 몸-색온, 감정-수온, 사유 생각-상온, 의지적 행동-행온, 인식하는 의식-식온)

-부처님 말씀 깊게 읽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대부분 읽는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동일한 ‘나’는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무상하다. 일관성 있는 나는 없다. 공, 무아. 나 없으면 새롭게 생을 산다. 이렇게 산 이가 관자재보살이다.

-행동할 때 동시적으로 깨닫는다. 불교 깨달음은 수행하면서 동시에 깨닫는다. 육조 혜능대사가 돈오돈수라고 함.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실천할 때 깨닫는다. 지혜와 자비. 자비란 철저하게 무아 깨달아야 가능하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할 때 5온이 철저히 비어 있음을 깨달았다. 반야로서 비추어보고 나 자아가 없구나. 그래서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났다. 죽고 살려면 '나'가 있어야 한다. '나'는 오온인데 태어나서 죽는 놈이 없다. 무명이다. 생사가 일어나는 과정을 철저하게 마음속에서 통찰하는 것이 불교 공부이다. 대상을 철저하게 보는 것이 공부이다. 신수심법이다. 내 몸부터 관찰하면 살아있는 몸에 반드시 느낌이 있다. 이것이 ‘수’이다. 호흡을 관찰하면 심념처 본다. 몸에서 일어난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짐 관찰. 느낌은 조건이 있다.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관찰하듯 보라. 심수심법 관찰하면 오온 통찰 가능. 8정도 가능, 제대로 정확히 이해하고 공부하면 누구나 부처 된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고성제. 오취온이 ‘나’라는 생각 때문에 문제 일어남. 어떻게 살 것인가가 [금강경]에서 가르쳐줌. 삶의 중심에 '나'를 놓고 사는 삶에서 벗어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도몽상. 고통의 원인이다. 괴로움이 오취온이다. 오취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살펴라. 몸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살덩이가 몸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이다. 몸은 물질로 이루어진 신체가 아니다. 신체는 음식으로 늘 변하고 있는데 동일한 몸으로 생각하는 망상을 하고 있다. 물질은 공하다. 물질은 아비달마 불교에서 일어난 사건.

-아비달마 불교 잘못되었다. 대승경전 생겨남. [금경강]은 대승경천 초기 경전이다.

-아비달마 불교란, 부처님 말씀이 상식적인 언어로 이해가 안 되어 방편으로 이론을 만들기 시작함. 이론화된 것이 불교를 망침. 부처님, 이론은 안된다라고 했다. '희론'이다. 희론이란 개념을 체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개념은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지 실체가 아니다. 진실이 아니다. 이론끼리 충돌하여 논쟁, 분쟁이 생긴다. 고성제이다. 부처님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법을 가르쳤다. 너, 나 라는 생각을 갖고 산다. 몸을 나라고 생각한다. 분별의식으로 세상 살다보니 ‘나 너, 우리’ 등 분별하여 생로병사의 고통이 생겨난다. 집성제이다. '고멸성제'이다. 8정도(정견-올바르게 보라. 오온 정확하게 통찰하기. 반야 없으면 올바른 깨달음의 길, 고멸의 길을 볼 수 없으면 지혜 정견을 갖고 이야기하자.)

-아비달마 불교-열반이란 생사와 다른 길이 있다.

-깊은 수행, 깊은 선정 삼매가 되면 열반이 된다.

-구차제정의 보살. 반야가 작용하면 선정이 허망함을 깨닫는다. 선정은 누가 확인하는가? 정신세계는 자기만의 것, 아무도 공유할 수 없다. 그래서 분열 싸우게 된다. 부처님은 선정을 비판하며 나왔다. 일상적인 삶에서 의미있는 것이 불교이다. 삼매보다 반야가 중요.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 의식으로 높여야 한다. 아녹다라 삼먁삼보리 최고 단계의 깨달음이 무상이다. 보편적인 삼보디 의미. 8정도 (사견은 서로 다르고, 정견은 서로 일치하는 것. 보편성)

-부처님, 와서 보라. 누구나 아는 것을 깨닫게 한다. 못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부처님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가르쳐준다.

-[금강경]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경전이다. 죽지 않고 사는 길을 제시한다.

-요즘은 윤리 도덕이 필요없는 시대이기에 계약을 필요로 하는 시대이다. 같이 살기 위해 계약을 맺고 산다. 서양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이익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자아실현'이란 이름으로 교육목표를 삼는다. 모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욕망의 충족이 이 시대의 고통이다. 자아실현이 아니라, 무아의 실현을 깨달아야 한다. 자아가 허망함을 알도록 해야 한다. 교육은 바른 안목, 지혜로 바르게 사는 것에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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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표 교수님의 [금강경 1-2]

* 금강경 의미 -

요령 위 손잡이 바지라를 한문 '금강'으로 번역.

번개 벼락 의미.

벼락을 맞으면 무엇이든 깨진다.

인디라천인 제석천이 들고 다니는 벼락 지팡이.

초기 경전에는 벼락을 치는 신이 인드라신이 아니었다.

흉악한 귀신인 야차가 금강저를 들고 다님. [맛찌마 니까야]에 나옴.

이 야차는 부처님 말씀에 의해 나중에 금강역사가 됨.

부처님 법문을 듣고 감화되어 부처님 법문 보호하는 신이 됨.

아무리 나쁜 야차라도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 훌륭하게 성품이 바뀌는 것을 의미함.

자이나교가 당시 인도에서 유명함. 마하트마 간디도 자이나교임. 자이나교는 엄격함, 비폭력적임. 상대주의, 폭력 행하지 않기 위해 농업에 종사 하지 않고 상업 종사. 부 축적. 불교 쌍벽 이루며 높은 도덕성 지님.

종교 붕괴된 혼란 시대에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살 것인가 부처님 법을 펼침.

-혼란한 시기에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갈 것인가?

시대상을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요즘 시대와 그 당시 시대상황 비슷함. 요즘 시대와 부처님 당시 사회 큰 변화 겪어 혼란스러운 시대이다.

-자이나교는 상대주의.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기에 동일한 판단이 없으므로 모든 판단을 인정함.

나도 옳고 너도 옳다. 무엇이 있다 주장 하면 옳다, 무엇이 없다 해도 옳다.

모두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동일한 판단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기에 모든 판단 인정하자. 코끼리 만지기는 자이나교 비유. 자이나교에서는 만지는 자마다 다 옳다. 모두 합치면 된다. 대신 내 말만 인정하지 말고 상대말도 인정해라.

-부처님도 부쟁 강조. 모든 주장을 거두어라. 어짜피 언어로 만든 이론들은 그 자체로 모순. 대신 체험적으로 접근해라. 직접 보고 체험적으로 인식하면 된다. 철학적인 글이 부처님 말씀. 많은 사람들이 샨자나티 개념적으로 인식하니까 싸운다. 이름없는 맛은 금방 모름. 개념이 없으면 잘 모른다. 이 속에 생로병사 다 있다. (산쟈나티) 인도의 향 이름 모르면 정확히 인식할 수 없다. 인도 사람들은 그 맛을 정확히 말로 표현. 누구나 식으로 형성된 식 안에 이름과 형태로 인식한다.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 의식 속에 형성된 관념 통해 세상을 본다. 명색에 명하여 육입이 있다. 산에 있는 야생화. 이름 모르면 다 잡초이고 야생화. 이름 알면 다 보이고 구분한다. 개념 갖고 이론을 만든다.

그러나 개념은 통칭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것이 아니고, 감정도 개념적으로 일어난다. 외국인은 욕해도 감정 일어나지 않는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감정도 일으키지 않는다. 식 때문이다. 자기 의식 속에 형성된 관념 때문에 감정 일어난다. 그 한계 알고 직접 몸으로 체험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체험은 아비자냐띠, 개념은 쌴자나티. 산자나띠 극복하고 아비자나띠로 인식하는 것이 수행이다. 평화롭게 살기 위해 부처님 말함. -직접 몸으로 체험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아비자냐띠로 갈등 해결. 싼자나티 문제. 아비자냐띠 반야로 알자.

-사짜까가 사는 마을에 부처님 오심. 무아설 주장. 오온은 자아, 나라는 것이 없다. 자이나교는 우리 몸속에 지바라는 정신, 자아가 있다고 주장.

-부처님 : 자아란 무엇이냐?

-사짜까 : 몸, 감정이 다 나다.

-부처님 : 만약에 몸, 감정, 오온이 내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내 것이라 할 수 없다.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되느냐?

-사짜까 : '안 된다.

-부처님 : 감정이 내 마음대로 되는가?

-사짜까 : ..........

-부처님 : 세 번 물을 때까지 대답하지 않으면 금강저로 네 머리를 부술 것이다.

-결국 자아라고 인정할 만한 것이 없음을 사짜가 인정함. 그래서오온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아상을 깨부심. 이것이 반야. 사견을 깨부시는 지혜, 반야 바라밀다이다. 이것이 금강경이다.

-반야 바라밀다는, ‘바라’는 최고로 도달한, 즉 지혜의 완성으로 보고 있으나, 사실은 반야 바라밀다는 조금 다르다. [벌유경]에서 뗏목의 비유경이다. [금강경]에는 ‘독사의 비유’경에 독사의 비유와 뗏목의 비유 두 개가 나온다. 이것을 독사의 비유경, 또는 뗏목의 비유경[벌유경]이라고 부른다. '무아'란 '나가 없다'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장애법(그런 짓을 하면 수행에 방해, 고통을 준다고 하는 법) : 한 제자, 나 없으면 벌 받을 일도, 윤회할 일도 없으니 아무렇게나 살면 된다고 오해. 그래서 아무거나 해도 괜찮다 여김. 이것이 독사경. 무아와 공 예민한 부분. 무아인데 살인하면 괜찮을까? 큰일난다. 생사는 본래 없다. 죽여놓고 생사 없다 주장하면 해악 크다. 독사 잡으려다 독사에 물린 격이다. 부처님 가르침 '무아의 핵심 잘 잡아라. 그렇지 않으면 해가 크다.

무아,

내가 없다가 핵심 아니다.

내가 무아라고 하는 것은 마음 속에 헛된 자아라는 망상이 자리잡고 있어서 이것을 없다고 한 것이지, 실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무아인가?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이것이 공, 무아설이다. 나는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살고 있지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내가 산다.

나라는 존재가 사는 일을 한다고 착각한다.

내가 태어났다고 말해 태어난존재가 있다고 여긴다.

내가 살면 태어날 필요 없다.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살고 있기 때문에 '나'라고 부를 뿐이다.

나를 바로 보려면 무아를 제대로 봐야지,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무아가 나이다.

이것이 참된 진아이다. 진아란 표현이다. 진아란 오온이 나라는 것이 아니라,

참모습은,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참모습이다.

비를 비유하면, 비가 있어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니까 비라고 부를 뿐이다. 내려오지 않으면 비가 없다. 내려오니까 비라고 부른다. 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비의 실상을 말할 뿐이다.

물방울이 하늘에서 떠다니면 구름이다. 떠다니는 것이 구름이다. 땅에 떨어지면 비, 흘러다니면 강이라고 부른다.

강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니까 강이다.

이것이 업보이다.

공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업설이다. 무아설과 업설은 모순되지 않는다.

관념적으로 공부하니까 오해한다.

비를 보라.

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모순된 개념 보지 말고, 실제 비를 보라. 떨어지는 것이 비이다.

아비자냐띠로 인식해라.

비라는 개념으로 현상을 보면 '비가 온다'라고 인식. 이것은 산자나띠.

억수로 쏟아지는 것이 비. 이것이 아비자나띠.

사는 것이 나이지. 나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가?

무엇이 되려고 하면 산자나띠.

부처되는 놈보다 부처 노릇하면 된다. 부처님처럼 살면 부처님이라 부르고, 도둑질하면 도둑이라 부른다.

부처처럼 부처 명함을 파려고 하기보다는, 부처일을 하면 된다. 부처님처럼 살려면 재산을 먼저 나눠주고 아무것도 없이 바루 하나 들고 7집 다니면서 맨발로 다녀야 한다. 왜 맨발로 다녔을까? 부처님 행실을 배워야지.

보리왕자(?)가 궁전 짓고 부처님을 초대하였다. 아난다 데리고 부처님 감. 흰 카페트 위로 부처님 올라가지 않고 있는 것을 아난다가 봄. 부처님 관심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이에게 늘 관심 갖고 이들을 위해서 삶. 맨발로 다닌 것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과 고통을 나누고, 일곱 집 다닌 것은 이들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박노해 시 낭송. 부처님처럼 못살아서 못산다. 초발심 명정각, 내가 부처님처럼 살아야겠다 생각한 순간 부처님 된다. 부처님 명함 갖고 싶은 것은 가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될 것인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조 도일 선사가 열심히 좌선하고 있는데, 남악회양선사 그 옆에서 기왓장 갈다.

마조 도일 : 뭣하러 기왓장 갑니까?

남악 : 거울을 만들려고 간다.

마조 : 기왓장 간다고 거울 됩니까?

남악 : 좌선한다고 부처 되냐?

마조도일 선사 깨닫는다. 평상심 깨달음. 남종 선 핵심, 조계종 선풍이 된다. 6조 혜능스님 돈법이다.

자아 집착 깨우치기 위해 무아. 업보는 있으되 작자는 없다. 무아 통해 나 없구나 가 아니라, 나라는 생각, 나를 명사로 보지 말고, 동사로 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을 사는 것인가? 이것이 무아 바라밀이다. 무아론, 유아론 대립, 이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대승경전, 여래장, 진여, 불성 나오면 불교가 아니다 라고 잘못 오해한다. 부처님은 방편으로 ‘없다’라고 하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언어는 방편이다. 그 본질을 깨뚫어야 한다.

여래장은 불경 [능가경]에 나온다. 내가 말하는 여래장은 무아의 여래장이다. 우리 속에는 여래가 들어 있다는 뜻. 너희도 부처님처럼 살 수 있다. 부처님처럼 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지, 속에 부처님 들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성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 있다. 이것을 없애기 위해 부처님 성품 있다 이것을 계발해라고 말해준 것이다. 이것이 자아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언어에 속박되지 말라. 뗏목에 비유. 무아 잘못되면 큰일, 독사 비유, 무아 집착하면 뗏목 비유. 내가 있다는 생각 사로잡히면, 무아 도리 깨달을 때 강 건너서도 '나 없어'라는 생각에 집착한다. 부처님 가르침도 버려라. 궁극에서는 그렇게 살면 되지 무조건 부처님 말씀 엄수할 필요 없다. 법도 버려야 하거늘. 부처님 가르침 이해하고 살면 되지, 부처님 말씀대로 살지 말라. 무아도 상황에 따라 진여, 부처 가능성 불성 있다 말해줄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 무아뿐 아니라 말하지 않는 유아 등을 말하면 안 된다. 무아 통찰 힘은 고통 현실에서 선정이나 지혜이냐? 선정 바라밀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반야는 누구에게나 함께 하는 통찰로서 드러난다. 초기 반야경. 반야바라밀 주장. 이것에 속한 것이 [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 초기에 속한다. 당시 인도 불교계가 잘못된 선정주의에 빠져서 많은 부파로 분열, 이론으로 대립 아비달마 논서들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서로 싸울 수밖에 없다. 반야바라밀이 중요. 지혜로서 해탈이 중요함을 대승경전에서 강조.

사리불이 보름만에 깨달음. 처음 계행. 불교에서 선정은 안정된 마음. 죄 짓고는 참선할 수 없음. 계율 먼저 지켜야 선정 일어난다. 계행을 잘 지키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해탈할 수 있는 힘 생긴다. 정이 나온다. 정과 행이 나온다. 선정이 새롭게 계속 나온다. [차제경]이다. 계단식이다. 이 계단 버리기 위해 반야 필요하다. 반야 없으면 아무 생각 없이 깊이 빠진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른다. 계단 버려야 윗계단과 만난다. 이상한 것이 보인 것이 반야 아니다. 계속해서 깨어 성찰하기 위해 화두 든다. 망상 일어날 때 화두가 깨어주는 역할 한다. 화두 못 들면 문제 생긴다. 화두에서는 말 보는 것이 아니다. 마조도일선사가 깨달았다. 참선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화두이지, 화두 뜻을 찾는 것이 아니다. 조계종 선법, 6조 혜능선사의 간화선 제대로 봐야 한다. 잘못된 선법이면 고쳐야 한다. 혜능 돈법은 부처님 말씀과 일치.

반야를 통해서 선정과 지혜 함께 가야하는데, 선정에 머물지 않고 반야가 선정을 끌고 가야 한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데까지 간다. 법에 집착하지 않고 해탈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 선정 들고 선정 관찰 살펴보고 다시 벗어나면 더 이상 없다 하는 곳까지 통찰하며 가야 한다. 누구나 이 단계도 체험할 수 있다. 누구나 다 통한다. 삼먁삼보리, 정각. 반야를 통해 해탈한다. 아비달마는 오해해서 선정 강조. [금강반야밀경]은 후대에는 반야로서 해탈. 선정주의에 빠지지 말라 강조. 반야는 일상 삶 속에서 통찰하며 닦아라. 마조도일 평상심으로 깨달아라. 일상 삶 속에서 수행하라. 부처님깨서는 사의성에서 걸식하고 발 닫고 명상. 금강경 출발. 이것이 금강경 취지와 보살의 길.

12쪽, 이와 같이 들었다. 세존께서는 사의성에서 식사를 마치고 발을 씻은 후 자리를 깔고 앉았습니다.

[니까야] 맨발 강조. 수보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오늘에야 부처님 뜻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7집 다니면서 발 씻고 앉은 뜻 깨달음. 이것이 보살의 길이었군요. 수행하는 것은 일체 중생의 고통을 함께함을 깨달았습니다." 아쇼카왕 부처님 열반 300년 후 통일. 불교인이 되어 많은 토지 불교에 바침, 불자들은 부자되어, 탁발 않고 이론 만들어 자기들끼리 싸움. 아비달마 불교. 이것을 비판함. 부처님 어떻게 살았나 봐라. 날마다 탁발했다. 시주로 사는 것이 부처님 삶이 아니다. 수보리 내세워서 부처님 사는 모습 보여줌. 그 당시 아비달마 불교인들에게 놀라운 일 보여주며 반성을 촉구함. 보살[큰 원을 세운 중생들]들은 어떻게 실천하고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까? 일체중생의 고통을 함께하고, 일체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이렇게 살아가셨군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되, 어떤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없이 살도록 하자. 아상없이 살아라."

-아상없이 살아라가 금강경의 테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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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2-1] 요약

-서양 철학 전통.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제대로 알 수 없으니 사유로 알아라.
-사유에 앞서 경험을 먼저 해라. 영국 경험주의. 과학 관찰 통해 원리 찾아내기. BC 6세기 인도에서 나타남.

모든 철학 전통 속에서 부처님 깨달음. 치밀한 논리가 밑바탕. 부처님께서는 논리는 한계가 있음 깨달음. 논리는 진리 알려주는 기능 못한다. 논리는 말하는 방법. 논리적으로 말해야 소통. 언어적 구조가 진실을 알려주지 못함. 언어 없으면 사유할 수 없음. 그래서 말 중요. 영어식, 한국식으로 사유. 언어 상실은 정신 상실. 언어 중요. 영어만 하는데 영어만 하면 영어식 사유구조 갖는다.

언어마다 사유구조, 사고 방법도 다르다.

부처님 당시 인도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 사회가 혼란해짐. 누가 옳고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 서로 싸움.

다 같이 인정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진리 찾기 위해 고민함. 함께 한다는 것은 다투지 않는다는 것. 생각하는 진리. 자유롭고 경쟁하는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평등하게 나눠먹는 공산주의. 평등하려면 제약이 가해진다. 개인 자유 억제. 이것이 대립. 모순들이 우리 삶 속에 있음.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모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갈등 해소되고, 투쟁없는 사회로 만들 것인가?

불교의 깨달음. 갈등은 사실 내면에서 시작된다.

불교의 깨달음은 초월적 신비로운 게 아니라, 21세기 서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원리 찾아내자는 것. 살아있는 생명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금강경]

고통 갈등의 중심에 자아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인류 역사상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라고 부르는 것에 나는 없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존재하는 나.

5가지 몸(수없이 생멸을 거듭함), 감정, 생각, 행동, 의식등

시간을 관통하는 나 자아가 없다.

무아설 아트만이 없다. 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 없이는 살 수 없다. 아트만식으로 나를 보지 말라는 뜻이다.

자아는 치명적 망상이다.

치명적이란 고통스럽고 생명을 위협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불교의 핵심이다.

삶 속에서 실체도 없는 ‘나’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산다.

불교 수행은 만들어진 ‘나’가 어떤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있는지 통찰하는 것. 정확히 지켜보는 것이 참선이다.

내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내면이 안 보인다.

조용히 앉아 호흡을 관찰하면 보인다.

참선하면 혼란스러운 생각이 보인다. 평소에는 혼란스러워 망상이 안 보인다. 시끄러운데 밖의 시끄러운데 보기 있으면 안의 시끄러움 안 보인다.

보면 사라지게 된다.

정확히 보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을 통찰한다고 한다.

통찰하면서 변화하는 것을 보는 것. 몸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것, 느낌 일어나는 것, 생각, 의지 욕구, 분별하는 것을 5온이라고 한다.

정확히 이해하고, 오온이 주는 고통을 정확히 이해, 파악하고 벗어나는 것이 불교 수행. 사성제. 고집멸도, 괴로움은 오온이다.

오취온이 괴로움. 오온을 자기라고 붙잡고 있는 것. 이것을 놔버리면 되는데 붙잡고 살기 때문에 다른 오온과 갈등 투쟁. 놔버리면 투쟁이 안 나온다. 쉽다. 고의 멸이란 삶 속에서 오온을 나라고 여기는 망상을 놔버리면 된다.

나라는 생각 없이 사는 사람. 나는 몸이라고 생각 안 한다.

감정, 고락의 감정 휩쓸리리 않고,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생각은 항상 무아라고 봐라본다. 개념적으로 보지 않는다. 의욕도 나를 위한 욕심이 없다. 5온이 멸해가는 것이 수행.

[금강경]은 괴로움의 소멸 위해, 자기 자신이라고 붙잡힌 것에서 해탈의 해달이다.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삶에서 나라는 생각 비우고 살면 어떻게 되는가 스스로 증명해 봐라.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할까?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줘야 할까?

나를 중심으로 살면 남은 수단이 된다.

상대방이 목적이 되는 삶을 살면 괴로움이 오는지 즐거움이 오는지 해보자.

개념이 아니라, 직접 해보면 안다. 선과 불선의 의미와 선과 악의 의미는 다르다.

기독교는 선악의 대립구조를 말했다. 선악의 갈등속에 하나는 없애버려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백년동안 전쟁을 했다.

안 좋은 기분 없애려 하지 말고, 좋은 기분으로 바꾸어야 한다. 선과 불선 좋은 것, 조금 안 좋은 것, 안 좋은 것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안 좋은 것을 좋게 만들어가는 것이 불교. 가치관의 문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자아라고 하는 망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상호간 갈등 투쟁이 늘어난다.

자아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 있다.

불교수행은 자아, 오온의 이해와 통찰이 수행이다.

오온, 안이비설신의. 불경에 많이 나온다.

-안이비설신의가 불교에서는 일체. 천지창조 근본은 안이비설신의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보이고 들리면있다고 여긴다는데에서 출발한다.

눈에보이면 있다한다. 그리고없다는 것은 안 보이면 없다고 한다.

있으면 보고, 없으면 안 보인다고 여긴다.

보니까 있을까, 있으니까 보일까?

사람들은 있으니까 본다라고 여긴다.

보는 놈이 있으니까 보인다는 것이다.

정말일까?

손바닥을 마주쳐 나는 이소리는 있어서 들리는 것일까요?

들리니까 소리가 있는 것일까요?

이 소리는어디로 갈까요?

불교수행은 하나를 잘 관찰하면 다른 진실들도 알게 된다.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모순관계. 있는 것이 없어지면 없어지는 것도 생겨야 한다.

있던 것이 아주 없어질 수는 없다. 논리학 언어구조학 있는 것은 있는 것, 없는 것은 없는 것이 기본 전제. 이 세상 소리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어진 것이 생긴다?

보이고 만져지면 있는 것이다.

반야로서 진실을 깨달아가는 것이 불교공부.

소리가 났다. 손바닥 치면 없던 소리가 난다. 손바닥 속에 있던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 치면 소리가 나온다.

존재 개념 유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소리가 어디로 갔지? 의심한다. 진공 속에서 손바닥 치면 소리가 안 나온다. 진공 속에서는 소리가 안 나온다. 소리는 손바닥 치니까 난 것도 아니다. 손바닥 마주치면서 공기도 있어야 소리가 나온다, 소리가 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면 소리가 나오고, 조건이 사라지면 소리도 사라진다. 인연이 있으면 나타나고 인연이 사라지면 사라진다. 인연에 따라 나타날 뿐, 무엇이 있어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금강경] 이다, 아니다, 소리가 있어서 소리가 나온 것이 아니다. 조건이 갖추어질 때 나타날 뿐이다.

모든 언어는 명사와 동사이다. 명사 감싸는 것이 형용사, 동사 감싸는 것은 부사이다. 어학 공부하는 방법은 명사와 동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알면 된다.

우리는 세계 이해할 때 명사로 본다.

명사로 지칭되는 이름은 안 변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은 변한다.

동사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명사 뿌리는 동사이다.

소리를 내야 목탁이지, 목탁 형상이 목탁이 아니다.

사과처럼 보이는 양초가 있다. 사과인 줄 알고 먹어봤더니 아니었다. 모양이 초인가, 불에 탄 것이 양초인가?

사람 또한 사람다운 사람이 사람이지 사람의 형태라고

해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람 노릇 해야 사람이다.

명사는 편의상 이름이지 그에 상응하는 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보면 다 아는 것이다.

내리니까 비이지, 비가 내리지 않는다. 흘러가니까 강이라고 부르지, 강이 흘러간 것이 아니다.

사니까 사람이지.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없지만 나는 산다.

이름이 사라져도 내 삶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명사로 구분한 모든 것은 허상이다.

사람들은 명사를 쫓아 산다.

-보살마하샬은 난생이든 축생 생이든 화생[극락세계갈 때 화생으로 간다. 극락세계는 남녀 성별이 없어 음욕이 없다. 부모가 없다. 극락세계에서는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라, 연꽃 위에서 태어난다. 연꽃 9개가 있어서 태어난다. 전생 공덕에 따라 상품, 중품, 하품으로 태어난다. 분수에 맞게 태어난다 이것이 화생이다. 천상 세계에도 그렇다. 욕계를 벗어난 곳은 다 화생으로 태어난다. 욕계는 욕망의 세계, 색계는 욕망이 없어 다 화생으로 태어난다. 범종 네모진 곳 연꽃 9송이 있다. 연화대이다. 종은 지옥 중생 구제하기 위해서 친다. 지옥아 깨져라. 종소리로 지옥세계 무너져 내린다. 지옥 깨지면 중생들 연화대 있는 극락세계로 태어나라. 화생] 모든 중생들이 형색있는 [색계 무색계] 세계이든 무색계[상이 있든-공처등] 모든 중생을 모두 무여열반에 들도록 하겠다. 최고의 목적지. 모든 중생들 모두 제도하겠다. 어떤 중생도 무여 열반에 들어간 중생은 없다.


-있다 없다는 명사적 구조. 명사는 본래 없다.

사람을 제도한다는 것은 명사적 존재를 제도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망상 벗어나게 하는 것이 제도이다. 기독교와 차이이다. 예수님이 구원해 준다. 예수님 안 따라가면 천국에 갈 수 없다. 내가 착한 일 많이 해도 천당 못간다. 불신 지옥. 기독교 믿음 강조.

불교 열반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본래 있는 것이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다.

몸속에 열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을 통해 달을 봐야지 손가락만 보면 시비가 일어난다. 모든 이론은 손가락 장난이다.

달을 봐보면 이론은 필요 없다.

부처님 말씀도 손가락 통해 달 지시. 손가락에 머물면 안 된다.

우리 삶은 명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살았다는 것은 움직임이다.

숨을 쉬고, 밥 먹고, 숨을 쉬려면 몸 안과 몸 밖에 있는 것이 동시에 작용한다.

세상과 나 분리되지 않았다.

명사로 보면 다 나눠보인다.

온 우주가 하나로 맞물려 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름으로 자꾸 분별한다.

이 분멸이 망상이다.

모든 투쟁 갈등을 명사 구조 강화할 때 나타난다.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이 연결되어 있어, 내 삶이 곧 다른 사람의 삶이다.

나라는 생각 없이 살면 남도 남이란 생각 없이 산다. 이것이 진정한 중생구제이다.

보살의 삶을 사는 사람은 모든 중생 구제 위해 살지만, 중생 구제하는 사람과 구제당한 사람 구별 없다. 이것이 보살의 길이다.

하나도 설한 바가 없다 손가락질만 했지, 현재의 마음이 열반, 열반이 본래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은 손가락, 의미는 달이다. 말을 통해 달을 봐야 한다. 손가락만 보면 산자나띠 개념적으로 보게 된다.

부처님 가르침조차도 손가락 역할을 했을 뿐이다. 손가락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아무 말도 안 한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이란 명사로 존재할 수 없다. 산다는 것은 움직임, 숨 쉬고, 밥 먹고. 숨 쉬려면 몸 안과 밖의 것으로 쉰다.

명사로 보면 나, 너 분리, 실제는 나와 공기 분리할 수 없다.

몸과 음식 맞물려 있다. 온 우주가 하나로 맞물려 있다.

이것이 삶이다.

이것을 자꾸 이름 붙여 분리하고 경계 짓는다. 이 분별이 망상을 키운다.

분별 깨기 위해서 산다.

내 삶이 곧 다른이의 삶과 연결되는 것,이것이 진정한 중생구제이다.

제도하는 중생이 있고, 제도 받는 중생이 있다 구별하지 마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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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표 교수님의 [금강경 2-2]

존재는 무엇인가?

내가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요?

나와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보고 듣는등 우리 지각활동에 의한 것이다.

있는 것을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다.

소리가 있다고 느낀 순간, 소리를 듣는 내가 나타난다.

지각의 순간을 잘 관찰해보면, 나라는 생각이 일어날 때 나 아닌 것과 상대해서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잠잘 때는 나라는 생각도 없고, 밖의 존재도 없다.

내가 있다고 여길 때, 동시에 밖에 있는 존재도 드러난다.

이렇게 우리의 의식은 무엇과 상대해서 있다.

상대가 없으면 나도 없다.

있다고 여기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데서 출발한다.

누가 태초에 세상을 만들었나?

진실인가 따져보면 지금까지 근거 없이 믿으며 살아왔다.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면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무상 정등정각이다.

불타가 이야기하는 진실이란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지각활동인 현재 삶속에서 만들어낸 이야기를 정확히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눈으로 바위를 보고 바위임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가 않다.

눈이 아니라 보는 작용, 시각 활동인 것이다.

현상을 동사적으로 파악해야지 명사적이 보면 안된다.

여러분의 의식은 태어날 때 의식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니까 (보기 때문에 눈이지 눈이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다. 목탁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니까 목탁이다.) 의식이 생긴다.

불타는 동사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을 말했다.

하나하나 정확히 보자는 것이다.

태어날 때 마음이 몸속에 있어 평생 살아간다 착각한다.

심지어 죽음 다음에 이 마음이 돌아다닌다고 생각한다. 자아가 속에 있다고 여긴다.

아무도 천당 극락 가본 사람은 없다.

우리들의 보고 듣는 지각활동의 결과로 그에 해당하는 의식들이

생긴 것이다.

어떤 놈이 있어서 보고 듣는다 생각하지만,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끊임없이 보고, 명사적 틀을 마음에서 지워낼 때 이것이

바른 지혜인 것이다.

일체가 공하다.

아무것도 없다가 아니라, 명사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본래 무일물은 동사적 구조 속에 번뇌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불타는 우리의 여섯가지의 의식을 말했다.

즉 보니까 시각 의식, 들으니까 청각 의식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힘을 쓰면 근육이 생기지, 근육이 있어서 힘을 쓰는 게 아니다.

이것은 함께 움직인다.

명사적으로 보니까 근육과 힘쓰는 것 둘로 보이나, 실제로는 작용하니까 근육이 생기는 것이 함께 일어난다.

운동 안 하면 근육이 쇠퇴해 진다.

뇌가 있어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니까 뇌가 만들어진다.

마음이 개체적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변화하고 발전한다.

구제할, 나와 별개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을 제도하는 것과 나를 제도하는 것은 하나이다.

자타일시 성불도이다.

이것이 자비, 그 자체이다.

일체 세계에 자비를 베풀지만, 어떤 누구에게도 베품이 없는 것이다.

시각활동(안)과 지각대상(색)을 연하여 시각의식이 생긴다.

보는 활동을 오래 안 하면 시력이 나빠진다.(퇴화한다)

어린애들은 처음부터 사물 분별 못한다. 눈을 맞춰주며 키운다.

인지 발달을 위해서 어려서 정보를 감각토록해 준다.

자아라는 의식도 그렇게 커진다.

비행기에 대한 인식경험이 없으면, 즉 비행기를 분별하는 의식이 없으면 하늘에 있는 것이 새인지 무엇인지 구분을 못한다.

우리는 비행기를 이름과 형태로 분별한다.

의식속에 비행기란 이름과 그에 상응하는 개념과 형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비행기가 있다'라고 말을 하게된다.

결국 밖의 비행기를 보고 비행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식속의 비행기란 궤범을 통해 비행기를 인식한다고 할 수 있다.

산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즉 산삼의 형태등 산삼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은 귀한 산삼을 봐도 여러 잡초중 하나로 알 뿐이다.

그러니까 산삼을 봐도 산삼에 대한 궤범이 없기에 '인식경험'(촉)이 안 생기는 것이다.

(만약 밖에 있는 산삼을 보고 '산삼'이라 인식하는 것이라면, 산삼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두 이를 산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도라지만 아는 사람은 도라지라고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 생각해왔지만, 불타는 그 옛날에 이미 그렇게 보지를 않았다.)

내 주변의 것은 모두 이름과 형태가 있다.

이것이 세계이고 존재이다.

이런 방식으로 세계가 나타난다.

보고 듣고 하는 데서 삶이 나타난다.

수행의 출발점은 눈으로 보고 듣고 할 때 항상 내 마음 속에 이것에 대한 욕구가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의식하는 기능을 잘 단속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욕망에 이끌린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사띠, 주의 집중이고 수행이다.

바르게 지켜보면 사라진다.

지속된 이러한 태도를 통해 인격이 달라지고 주변이 달라진다.

특별한 깨달음 상태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바른 견해속에 이러한 삶의 지속을 불타는 요구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알고 하면 특별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마음속으로 무엇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정확히 보는 것이 지혜이다.

누구나 힘이 있다.

삶을 살펴보면 보고, 듣고 하면서 대상 분별하는 의식 생기고, 여기에서 느낌, 감정, 생각, 의지등이 형성된다.

삶의 반복을 통해 여러 의식이 쌓인다.

의식은 모여서 형성된 것이다.

행위의 결과이다.

그 결과물들이 마음이다.

그 마음이 움직여 또 다른 의도속에 행위를 한다.

운동하면 근육이 만들어지고, 또 그 근육으로 운동을 한다. 상호적, 동사적이다.

보고 듣고 만지는 경험으로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나'다, '사람'이다란 관념일 뿐이다.

지각활동의 결과, 의식이 형성되어 이런 관념을 일으킨다.

인간의 마음은 지각활동으로 일어난다.

어린애들에게는 산에서 마음껏 자연과 교감하도록 하면서 커야 제대로 자란다. 학교에서 건물로 가두어 두니까 오락에 빠지고 싸운다. 자연과 교감하며 행복감을 느낀 아이들은 바르게 자란다. 사람을 어떻게 교육시킬지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무상. 내가 원하는 생각 갖고 있으면 괴로움. '아'라는 망상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다 사라지면 열반이다. 이 경 하나만 제대로 읽어도 금강경 의미 드러난다. 금강경 깨달은 사람이 6조 혜능 선사이다. 돈오돈수 이야기했다. 돈오하면 돈수할 수밖에 없다.

운동과 근육 생기는 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이것이 돈이다. 선정과 지혜 둘이 아니다. 선정과 지혜는 일체, 체와 용이다. 운동할 때 근육의 양과 질이 다르다.

어떤 것도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너는 누구냐?'라고 말할 수 없다.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삶도 죽음도 없다.

한 물건이란 명사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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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표 교수님 [금강경 3-1]

계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둑질하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마음의 구조가 그렇다.

마음이 바로서야 안정되고, 반야가 바로 선다.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할 때 반야가 작용한다.

그러나 대부분 분별이 작용하다. 식이다.

분별하는 것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밖에 있는 것을 정확히 인식한다고 생각하나 진실이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통찰하는 것을 반야라고 한다.

[부시맨]이란 영화에서 콜라병을 부시맨이 주었는데 이를 콜라병으로 인식 못한다.

이름을 모르기에 콜라병이라는 개념을 떠나 체험적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주운 사람의 의도나 욕구가 작용하면 그 의도한 바로 쓰이게 된다.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병으로 소리를 내고, 방망이로 쓰고 싶으면 그에 합당하게 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욕망에 의해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욕계이다.

이것이 진실되다 믿고 살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통찰. 사람들은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통찰이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는너무도 강하게 자신의 의식에지배를받고 살아 쉽게 변화를 위한 통찰이 오긴 어렵다.

자기 생각대로 산다.

훈습은 인류 역사와 함께 한다.

우리의 의식은 자녀에게 전달된다.

의식의 역사를 보면 그렇다.

깊이 뿌리박힌 분별, 즉 산자나띠 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본다.

산냐란 개념이다.

우리는 개념이란 모호한 관념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목탁 모양이 다 틀려도 사람들은 다 '목탁'이라고 한다.

이것이 언어(개념)이고, 일상 삶의이름(명사)들이다.

이름 가지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이름이 없으면 세상을

못 볼 뿐만 아니라, 실상에 접근치를못한다.

"모르는 것은 손에 쥐어줘도 못 본다."

이름이 없으면 보고도 인식을 못한다.

산에 있는 많은 나무도 이름을 모르는 것은보지를 못한다.

언어는 욕망의 지시어로, 이름이 없다는 것은 나의 관심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이름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분별의식이 사물의 실상을가리는 것이다.

'자라보고 놀란 놈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다.

자라에게 물리면 비슷한 솥뚜껑만 봐도 경험된 두려움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자라가 다 무는 것도 아님에도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가지고 개념을 만든다.

분별 개념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오온을 통찰, 어디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살펴 분명히 깨닫는 것이 수행이다.

이것이 선정이고 지혜이다. 정확히 선정해야 지혜가 자란다.

[금강경] 나올 즈음 인도에서 아비달마 불교가 생겼다.

불교 승단에 분열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계율문제로, 뒤에는교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관점 차이로분열을 일으켰다.

이론으로, 산자나티로 분열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론이 아니다.

나에게 적용하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산자나띠이다.

이는 손가락만 보는 것이다. 달을 봐야 한다.

[금강경]에서 손가락이란 상을 보지 말라는 표현으로 나온다.

자신 또한 '나'라는 관념으로 보고 있는데, 경험을 통해 형성된 관념이다.

성장과정에서형성된 것을자아라고 붙들고 산다.

누구나 일상 삶에서 억울하고 분한 일이 많다.

이것은 자기 생각일 뿐. 내 의식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 내면을 정확히 관찰해야 한다.

수행이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부처님도 "너 자신에 의지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평소 하신 말씀을열반 하실 때 강조하셨음을 상기해야 한다.

돈오, 돈수, 점수가 나온다.

실제 수행에서는 이런 논쟁은아무 의미 없다.

자기 생각만으로 논의한 것일 뿐,수행해본 사람은 돈오 측면, 점수 측변이 다 보인다.

돈수로 말해도 좋다.

말로 붙들고 싸우지 말라. 상을 버려야 한다.

돈오는 어떤 때 쓰는 말입니까? 어떤 때 점수라고 쓰입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

수행 안하니까 개념만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이렇듯 실제를 떠난 이론이 세상 모든 논쟁의 본질이다.

싸움이 일어난 곳은 산자나띠 때문에 싸운다.

통찰하고, 자기 안에 형성된 그릇된 망상 깨지 않는 한 무쟁의 삶, 세계 평화 이룰 수 없다.

인간 스스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망상 거두어내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래서 투쟁이 심화되고 있다.

그 원인을 알아야 한다.

[금강경] 공부하는 이유가 스스로 삶 속에서 모든 잘못된 것을 통찰하기 위해서다.

6조 혜능 스님은 나뭇꾼으로노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시장에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켜라"는 금강경을 듣고 깨치셨다고 하나아무것도 모른 사람이 알아들을 리 없다.

상징적 의미이지 실지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스님은 산쟈나띠 하지 않았다. 문자속으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언어 모르고 경을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연기하는 관계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관통하는 윤회하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숨 쉬니까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숨은 밖에서 들어오고,밖으로 나간다.

입으로 음식이 들어오고 몸 밖으로 나간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먹고 싸는 과정 속에 있다.

이것이 연기이다.

조건 때문에 존재하지, 시간을 관통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나'가 있다 여긴다.

그러나 그런 '나'는 없다.

촛불이 켜져 있다.

촛불이 계속 있는 것처럼 보이나,그냥 기름이 타고 있을 뿐. 그래서 열이 나고 빛이 나고 있을 뿐이다.

기름을 끊으면 꺼져버린다.

여러분은 촛불이 있다고 여긴다.

유, 존재는 없다.

공이다.

‘촛불은 공이다’가 촛불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세상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항상시간을 관통해서 있다고 착각한다.

반야 통찰하라.

분별의식 관념상으로 세상 보니까 그렇다.

촛불이라는 이름에 상응하는 것이 내 눈에 있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촛불은 명사로 존재한 적이 없다. 동사이다.

촛불이 생겼다 없어졌다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본래 생사없는 본래 우리 모습이다.

위 촛불의 이야기를 통해 부처님의 해탈을 이해하기 바란다.

'해탈 후 언제 태어납니까?' '태어난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열반하면 어디로 갑니까?' '어디를 가지를 않습니다.'

사람의 몸은 촛불과 같다.

36.5도로 타는 촛불이다.

체온이 식으면 죽었다고 말한다.

음식을 먹고 자란다.

보고, 들을 때의식이 형성된다.

보고 듣고, 감촉하는 경험, 의지,분별하는 의식을 통해내 의식은자라난다.

초기 경전을 바탕으로 읽을 때 [금강경]은 바르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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